유튜브 시대에 시청률 65%, 무슨 가요제?

Feb 12, 2024

74돌 된 이탈리아 ‘국민 가요제’ 산레모…’옛것 고수’ 국민적 특성 영향도

산레모 가요제
산레모 가요제 (산레모 AP=연합뉴스) 산레모 가요제 이틀째를 맞은 7일(현지시간) 진행자 아마데우스(오른쪽)가 톱 5 순위를 발표하고 있다. 

44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전국노래자랑’과 같은 장수 음악 프로그램이 이탈리아에도 있다.

매년 이탈리아 서북부 해안 도시 산레모의 아리스톤 극장에서 열리는 ‘산레모 가요제’가 바로 그것이다. 역사는 산레모 가요제가 훨씬 길다. 1951년부터 시작돼 올해로 74회째를 맞았다.

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전국노래자랑과 달리 산레모 가요제는 매년 2월 둘째 주에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닷새간 진행된다.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도 세월이 흐르면 쇠퇴하기 마련이지만, 산레모 가요제는 수십년 동안 이탈리아 최고의 음악 축제로 독보적인 자리를 지켜왔다.

올해 첫날인 지난 6일(현지시간) 시청률은 무려 65.1%를 찍었다. 지난해에는 최고 시청률이 66.5%에 달했다. 축구가 거의 종교나 마찬가지인 이탈리아에서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의 A매치 시청률과 맞먹는 수치다.

이탈리아 공영방송 라이(RAI)에서 생중계하는 산레모 가요제는 첫해인 1951년 라디오로만 방송됐지만 주최 측의 기대를 뛰어넘는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2차 대전 패전국이 된 이탈리아 국민들의 패배감과 상실감을 달래줬던 것이다.

산레모 가요제가 워낙 인기를 끌자 유럽 방송 연합에서 기본 틀을 본떠 만든 유럽지역 국가 대항 가요제가 바로 1956년 시작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다.

산레모 가요제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도메니코 모두뇨의 ‘볼라레’를 통해서다.

1958년 산레모 가요제 우승곡인 이 곡은 미국에서 칸초네 역사상 최초로 빌보드 1위를 차지했다. 그래미 시상식에서는 ‘올해의 앨범’과 ‘올해의 노래’를 모두 거머쥐는 쾌거를 이뤘다.

이후에도 산레모 가요제는 안드레아 보첼리, 로라 파우시니, 에로스 라마초티, 이바 자니키, 마르코 마시니, 일 볼로 등 수많은 가수와 히트곡을 배출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2022년 미국의 3대 음악 시상식 중 하나인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에서 ‘톱 록 송’ 트로피를 가져간 이탈리아 록밴드 모네스킨도 산레모 가요제 출신이다.

산레모 가요제의 특징은 기성 가수와 신인 가수 모두에게 자신의 재능을 선보일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기성 가수들에게는 출연 자체가 인기 가수로서의 척도이자 영예로 받아들여진다.

경쟁 형식도 ‘빅 아티스트'(캄피오니), ‘신인'(누오베 프로포스테) 등 다양한 카테고리가 있는 경연 형식으로 구성돼 흥미를 더한다.

팝, 록, 클래식 등 다양한 음악 장르를 아우르기에 각양각색의 음악적 취향을 가진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점도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

총 30명의 아티스트는 자신의 창작곡을 공연하고 심사위원단과 온라인 투표를 통해 최종 우승자를 선정한다.

초대 손님의 면면도 화려하다. 스티비 원더, 셰어, 셜리 바세이, 로비 윌리엄스, 퀸, 스팅, 리키 마틴, 에미넴 등 세계적인 유명 아티스트들이 출연했다.

올해에는 축구 스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할리우드 배우 존 트라볼타와 러셀 크로 등이 초대 손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달 호주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이탈리아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정상에 오른 얀니크 신레르가 출연 요청을 고사한 사실이 큰 화제가 된 것도 산레모 가요제가 누구나 선망하는 프로그램이어서다.

단순히 음악 경연 프로그램이라기에는 볼거리도 많고 최근에는 출연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가미하는 등 리얼리티 TV 쇼에 가깝게 진화하면서 산레모 가요제는 매년 뜨거운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산레모 가요제는 수십 년에 걸쳐 이탈리아 문화에도 깊숙이 뿌리내렸다. 매년 2월 초가 되면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산레모 가요제를 시청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부모님과 함께 TV로 산레모 가요제를 봤던 추억을 간직한 세대가 이제는 자녀들과 함께 시청하면서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다.

최근 이탈리아의 한 유튜버가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에게 왜 산레모 가요제를 보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어릴 적부터 봤기 때문”이라거나 “자연스럽게 보게 된다”는 등의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이탈리아 수도 로마는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서도 옛 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1954년에 제작된 영화 ‘로마의 휴일’에 담긴 로마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별반 차이가 없다. 이탈리아인들은 불편할지라도 옛것을 지키고 사는 데 자긍심을 가지고 산다.

이러한 특별한 문화는 정보기술(IT) 변화에 둔감하고 여전히 아날로그를 선호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실제로 이탈리아 운전자 대부분은 지금도 수동 기어를 사용한다. 전기차 판매율이 유럽 전체에서 최하위인 곳이 바로 이탈리아다.

인터넷, 스마트폰 등 다른 방송 수단의 발달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지상파 TV 시청률이 추락하는 상황에서도 산레모 가요제가 여전히 60%가 넘는 기록적인 시청률을 구가하는 것은 이탈리아인들의 독특한 감성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